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축소 폭로 === 하지만 당시 [[서울남부교도소|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이자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훗날 [[열린우리당]] 의장)이 사건이 '''축소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휴지에 적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외부에 알려졌는데 정말 우연히도 이부영이 수감된 교도소 옆방에 2명의 고문경찰관인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가 들어왔다. 이부영의 증언에 따르면 옆방에서 계속 우는 소리가 들려서[* 특히 강진규 경사의 경우 아버지가 '정말 네가 사람을 죽였느냐, 그렇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친분이 있는 [[교정직 공무원|교도관]]을 통해서 알아보니 '사실은 고문경찰관이 더 있는데 우리만 잡혀왔다. 우리들만 모두 뒤집어쓰게 됐다.'는 진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684418#cb|관련 기사]] 군부독재정권 시절에는 교도소에 들어온 반독재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인 교도관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교도관과 [[경비교도대]]원들의 폭압적 통제가 기승을 부렸던 1986년부터 1987년까지의 상황에는 더더욱 그랬다. 대놓고 표현은 못 해도 이런 교도관들이 은근히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교도관 중에 한 명이 "사건이 축소은폐됐다"는 것을 이부영에게 알려주었고 이부영이 은밀하게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문서는 또 다른 교도관 1명을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1939)|김승훈]] 마티아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이 교도관들의 신원은 혹시 모를 불이익 때문에 비밀에 부쳐지다가 모두 정년퇴직한 2010년에 같은 영등포 교도소에서 근무했던 직원이 <가시 울타리의 증언>(황용희, 멘토프레스)이라는 책을 쓰면서 강제로 [[아웃팅]]시켰다.[* 원래 교도소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던 직원이라 계속 기록했고 당시에도 이부영과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가 책 추천사까지 써 주었다.] 이부영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 사람들을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고 표현했다. 처음 이부영에게 사건의 전말을 귀띔한 사람은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 경찰들끼리 면회하는 과정에서 교도관이 입회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구속된 경찰 2명에게 입막음조로 2억원이 든 입금 통장이 제시되었고, 3명의 고문 가담 경찰이 더 있다'는 등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게 되어 이를 이부영에게 알려주었다. 사건 이후 인천구치소 부소장, 청송제2교도소장, 청송교도소장, 서울지방교정청장 등을 역임했는데 책이 나온 후 진상이 알려져 배신자 취급당했다는 썰이 있다.]였으며 이부영의 부탁으로 펜과 종이를 전달한 후 작성된 쪽지를 외부로 운반한 사람은 교도관 한재동이었다. 이 2명은 2012년 박종철 25주기 추모식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7141531#home|#]] 그리고 한재동은 퇴직 교도관 전병용[* 1979년 3월 교도관의 복장 문제로 상급자에게 폭행당한 사건에 반발해 연판장을 돌리다가 해직된 인물. 당시에는 간판업에 종사했다.]을 통해 김정남에게 문건을 전달했고 김정남은 다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알렸다. 즉, 안유 계장 -> 해직기자 이부영 -> 한재동 교도관 -> 전병용 퇴직 교도관 -> 재야 운동가 김정남 -> 함세웅 신부 순으로 문건이 만들어져 이동하고 세상에 알려진 것.[* 김정남인 원래 국회에서 터트리려고 [[김덕룡]] 의원에게 전달하여 신민당으로 갔는데 그쪽에서 꺼려 다시 3명의 손을 더 거쳐 함세웅 신부에게까지 전달되는 등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경로로 전달되었다.] [youtube(OxuE8kEysQs)] 또 당시 검안의였던 [[중앙대학교/학부/의과대학|중앙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오연상은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알았고 거기에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병원에서 숨졌다고 조작하여 은폐하려는 경찰의 음모를 알아채고 [[중앙대학교병원]] 측에 시체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당연히 같은 죽음이라도 고문실에서 사망과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 중 사망은 뉘앙스 자체가 다르다. 결과적으로 박종철의 시신은 경찰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았다. 경찰은 이후 오연상에게 수사관 3명을 붙여 감시하였고 그 다음 날(15일)에도 감시했으나 오연상은 화장실에서 잠입하고 있었던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을 불현듯 만나서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음을 알렸다. 소리소문없이 은폐될 수도 있었던 박종철 사건은 한 의사의 양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을 알고 싶다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0029115|이 링크]]를 클릭하면 좋다. 이후 [[고려대학교|고려대]] 법의학과 교수로 박종철 시신을 부검한 부검의 황적준도 "사인을 심장쇼크사로 하라"는 외압에 시달렸지만 불의에 타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부검결과를 발표함으로써 오연상의 검안을 확증하였다. 하지만 오연상은 이후 신길동 특수수사 2대[* 당시엔 신길산업으로 가장하였다.]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그 옆에서는 비명소리가 연거푸 들려 왔는데 박종철을 고문하던 수사관들을 '''조사'''하는 소리였다고 한다. 오연상은 '''"참 이상한 세상이다. 박종철 군을 고문해서 죽이고 이번엔 그 수사관들이 고문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하였다. 경찰 및 안기부 상층부는 이들이 고문치사에 책임을 지고 구속되는 것에 불만을 품자 상관인 [[박처원]] 치안감을 통해 5,000만 원이 들어 있는 예금통장 4개, 즉 2억을 준비해 2개씩 주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2개씩 1억 원을 주고, 곧 가석방으로 꺼내주겠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참고로 80년대에 가장 비싸기로 소문난, 그리고 지금도 유명한 [[압구정 현대아파트]] 50평대의 매매가가 1986년 기준으로 1억 정도였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621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6-21&officeId=00032&pageNo=6&printNo=12534&publishType=00020|기사 참고]]] 이 돈의 출처를 묻자 "경찰 동료들이 조금씩 모았다"고 했는데 누가 봐도 안기부 자금이었다. 믿을 사람은 없었지만 밝힐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다. 더불어 정권 내 알력이 이것의 은폐를 막았다는 견해도 있다. [[10월 유신]] 이후 최종길 교수나 [[장준하]]의 의문사가 있었고 더욱이 1985년부터 1986년에도 기혁, 우종원, 신호수, 김성수 등이 당한 의문사들이 묻혀져 경찰은 고문을 마음대로 자행하던 판국이었다. 그런데 당시 2인자이기는 했으나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 [[국가정보원장|국가안전기획부장]]과 후계자 경쟁을 해야 했던 [[노태우]] 세력은 내각제를 추진해 주도권을 쥐려고 했고 장세동 측은 이에 고문 사실을 흘려 이를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려고 했지만 이 사건의 파문이 크게 번지면서 오히려 장세동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대국민적 저항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497.html|#]] >[[구약성경|제1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아우,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젊은이, 너의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눈 가리고 아웅한다|'탕'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려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권위주의|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수주의|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이기주의|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 > -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https://youtu.be/88Ye22rRzVA|박종철 열사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군 추모 및 고문추방을 위한 인권회복 미사의 김수환 추기경 강론문[* [[http://cc.catholic.or.kr/root_file/seoul/jubo/1980/%EC%A0%9C0469%ED%98%B8-%EC%97%B0%EC%A4%91%20%EC%A0%9C4%EC%A3%BC%EC%9D%BC.pdf|서울주보 제469호 3면~5면]]] 앞서 발표된 2명 이외에도 3명의 고문 경찰이 더 있었다는 사실은 이부영의 비밀서신을 통해 세상에 은밀히 전해졌고 이를 공개한 사람들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1987년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1939)|김승훈]] 마티아 신부의 폭로로 진상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처음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 정권은 보도지침과 [[언론통제]]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고 했고 일부 언론에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51900329207016&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7-05-19&officeId=00032&pageNo=7&printNo=12811&publishType=00020|단편적인 보도]]만 작게 나왔다. [[http://cc.catholic.or.kr/root_file/seoul/jubo/1980/%EC%A0%9C0485%ED%98%B8-%EB%B6%80%ED%99%9C%20%EC%A0%9C6%EC%A3%BC%EC%9D%BC.pdf|서울대교구 주보에도 나왔다.]]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하면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5월 22일 [[동아일보]]에서 경찰의 사건 은폐와 가담자 축소 사실의 구체적인 내용을 처음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52200209201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5-22&officeId=00020&pageNo=1&printNo=20194&publishType=00020|대서특필]]하고 이후에도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나갔다. 이 보도들로 동아일보 취재팀[* 김차웅, 윤상삼, 임채청, [[황열헌]], 황호택]은 1987년에 [[한국기자상]]을 받았고 1988년에도 한국기자상[* 정동우, 황호택]을 받았다. 이날 동아일보를 찾아보면 [[김승훈 마티아]] 신부의 폭로로 드러난 고문가담 경찰 은폐 관련 보도로 신문의 3분의 1 이상이 채워져 있다. 그만큼 충격적인 뉴스였다는 이야기.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추가적으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당시 정 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 중 3명의 공동정범이 있음을 인지했고 이를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하자 서 총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고 한다. 덮을 생각이 없었고 3명의 사법처리를 타진하고 있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했다는 것이다. 사실인지의 판단은 알아서 하자. 결국 5월 22일 경찰은 공동정범 3인을 스스로 연행해 서울지검으로 데려왔고 공동정범 3명(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호 경장)이 구속되었으며 이후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한 박처원 치안감(당시 치안본부 5차장), 유정방 경정(당시 대공 수사2단 5과장), 박원택 경정(당시 대공 5과 2계장) 등이 추가 구속되었다. 이에 검찰은 사건 당일인 1월 14일 오후 5시경 치안본부 대공사무실에서 조한경 등 고문경관 5명이 모여 박종철 사망 사건에 대한 <동행피해자 변사사건 발생 보고서>를 쓰면서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이 범행한 것으로 축소하기로 하고 유 경정의 지시에 따라 박 경정이 은폐 조작을 지휘한 뒤 고문경관 5명에게 예행연습을 시켰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강 전 치안본부장에 대해선 사전 조작에 직접 관계가 없다고 하여 돌려보냈다. 수사 주체를 지검에서 대검으로 격상시키기까지 해서 집중수사를 편 검찰은 "검찰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의 의문은 없다"고 밝혀 의문만을 남겼다. 이 중 가장 큰 의문은 박 치안감이 조작 각본의 총 연출자인가 하는 점과 일개 치안감이 엄청난 사건을 수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혹이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박종철 사망 1주기인 1988년 1월 14일에 당시 담당 부검의와 수사 담당검사의 증언으로 점차 드러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이 "부검 과정에서 경부압박 질식사로 판명되어 보고했으나, 강 치안본부장으로부터 '부검소견서를 변경하고 외상 부분을 빼라'는 외압이 있었다"고 증언했고 당시 수사 검사였던 안상수 역시 "박종철 사건을 검찰에서 직접 수사하려 했으나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초동수사를 경찰에 맡기기로 하면서 사건 조작의 여지를 주었다"는 충격적 발언을 하면서 또 반전되었다. 이 둘의 증언으로 검찰이 다시 수사에 나서면서 1월 14일에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을 자진 출석케 한 뒤 다음날에 구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강민창이 국과수 소장에게 100만원을 주며 회유하려고 한 사실이 드러났고 황적준은 조직에 해를 끼쳤다며 국과수를 떠났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못한 점이 더 있다. 특히 가장 의문이 된 것은 사건 전개과정에서 치안본부장이 최고 사령부로써 독자적 권한을 발동해 사태를 수습/무마했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안상수가 증언한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더 의혹이 증폭되었으며 초동 수사과정에서 검찰의 명예를 걸고 즉시 수사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던 검찰이 태도를 바꿔 경찰에 수사하도록 한 점, 송치 4일 만에 조한경 등 2명에 기소명령이 떨어진 것과 조한경 본인이 심경 변화로 옥중 폭로를 했는데도 3개월 간 수사를 미룬 점도 한 몫 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법무부 고위 관계자가 조한경 등이 수감된 영등포교도소(현 [[서울남부교도소]])를 방문하고 3월 초에 이들이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된 경위 역시 의혹이 더 불거지게 했다. 또 박종철의 폐에 나타난 출혈반으로 보아 전기고문이 있었는가 등의 의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